2024.05.01
오늘 라운딩 돌고 하루를 보내고 나니까 힘빠져서 적는 작은 글
내가 싫어하는 미국의 일면 중에는
Show and Tell,
일단 말을 잘 해야 하고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 보여야 하는 면이 있다.
비즈니스 스쿨 같은 데를 갔으면 진짜 힘들었을 것 같음.
만만해 보이기 싫은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화의 흐름 속에서는 나도 모르게 입을 닫아 버리는 성향도 답답하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결국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실제로 환자에게 필요한 일들은 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박수를 받고 "오 너 좀 하는구나" 하고 인정 받는 분위기도
맘에 안 들지만 ......
솔직히, 다른 것만 아니면 그러려니 할 것 같은데 암튼 이 톡식한 환경에서 어찌됐든 추천서를 받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게. 가끔씩은 좀 지칠 때가 있다.
* * *
이 성향은 자존심 센 / ego가 강한 백인 남자 어텐딩 + 카디올로지 서비스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실제로 주변 사람들은 많이 욕하지만 나랑 잘 맞는 내 멘토도 젊은 half-히스패닉계 여자 교수님)
전반적으로 나랑 잘 안 맞는 성격이라고 생각되는데..... 가장 답답한 건 일단 이 기관에서의 "빅 네임"은 많이들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힘도 권력도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결국 그 사람들이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좋은 추천서를 받는 식으로 재생산된다.
하 그냥 나이스한 저번 어텐딩한테 추천서 받고 치울 걸 그랬나보다 ㅠㅠ 그 사람도 약간 톡식했던 것 같긴 한데.. 나랑 잘 안 맞는 사람 눈에 들기를 바라는 것만큼 답답한 게 없다
* * *
이번에 치프로 뽑히고 나서
어쩌면 그래도 말랑이처럼 사는 것도 괜찮다고 인정받았는지도 몰라!! 하고 혼자 좋아했는데
몰랑말랑 엔프피 감성을 유지하며 조금은 감성적이고 조금은 유약해 보여도, 남들처럼 말빨이 세지 않아도 조금 느려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어쨌든 이러나 저러나 결국 평가 앞에서 vulnerable한 내 모습에,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시스템에 실망하고
되돌아보면 다시 고개를 드는 회의감과 자기 부정.
그래도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작은 노력들이 누구에겐가는 보일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 * *
그렇게 하루를 끝내고 집에 가는데 Y를 마주쳤다
인턴 Y는 중국에서 온 IMG고 나보다 하나 아랫년차다. Y를 왜 알게 되었냐면 작년 치프 중 한 명이, 새로 들어오는 Y가 중국에 있는데다가 출산을 하고 오느라고 조금 늦게 시작할 거라고 내게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딱히 연락은 오지 않았고, 나는 Y를 10월경 첫 병동 당직 때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 때 당시 어설프고 불안해 보였던 Y, 지금은 중환자실 로테이션을 돌고 있었다. 퇴근하는 나를 보자마자 호다닥 달려와서 인사하길래 넌 어딜 가니 물어봤더니 본인도 중환자실 로테이션 돌고 일찍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뭔가 나와 상당한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듯한 반응이었다.
젤 먼저 치프 되는거 기분이 어때? 하고 묻더니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와르르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하는데, 꼭꼭꼭 나랑 얘기하고 싶었단다. 일 년차 때 내가 하던 고민들을 줄줄 털어놓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했다. 나는 일년차 때 어땠냐고, 자신 있었냐고 물어보면서 자기는 아직도 병원 내 문화 차이 때문에 힘들다고, 언어 장벽이 크게 느껴진다고, 다른 애들은 노트 쓰면서 잡담도 많이 하는데 본인은 영어로 기록 쓰려면 열심히 집중해야 해서 애들 잡담도 안 들리고, 그래서 친구 사귀기도 힘들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용기내려 해 봐도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소극적으로 느껴지고, social하게 지내기 어렵다고. 특히 애기도 너무 어려서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었다.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나를 보면서 위안을 느끼는 것 같았고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그맘때 그랬던 것 같다. 2년차 초반에도 그랬던 것 같고. 어떻게든 내가 잘 지내고 있다고, 여기서 적당히는 하고 있다고, 환자한테 해가 될 정도로 처지고 있는 건 아니라고, 이렇게 느끼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고... 누구에게라도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아직 펠로 행방이 결정되지 않은 지금조차도, 조금 깊게 생각해야 할 때면 불안감이 고개를 든다. 특히 여기서는 네트워크가 안전망과 다름없는데 그 안전망 없이 와버린 데다가 너무나 다른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드니까. 당연한 일이다.
금요일에 중국/태국계 1년차 후배들이랑 (한명은 나랑 고딩 때 과학전람회에서 만났는데 여기서 후배로 만남 + 태국에서 온 후배는 비슷한 태국 의대 졸업생이다) 초밥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너도 오지 않겠냐고 초대했다. 마침 오프라는데 애기가 있어서 실제로 같이 놀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 친구가 잘 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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